1.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고
100여년 전 작품인데도 현재의 젊은이들이 고민하는 사랑과 우정을 생각나게 하는 소설입니다. 읽으며 추리소설 같은 전개과정으로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었으며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전하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위하여 친구K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하여 평생 죄책감으로 괴로와하다 결국 친구K 가 자살한 것 같이 선생님(소설상의 명칭)도 자살한다는 것은 사람이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에 이 마음이란 것이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는 인간만이 갖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며 기뻐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며 슬퍼하고 분노하는 등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복잡한 거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친구K 도 선생님도 모두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자살을 선택하게 됐으니까요
마음은 1914년에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발표한 소설 작품이다. 작가가 사망하기 2년 전에 발표한 소설이며 사망하기 전으로부터 3번째로 발표한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부터 이어져오는 에고이즘적 경향이 극적으로 나타난 소설로, 전후 일본 문학 중 600만 부의 판매 부수를 올린 역작이다.
원래는 단편집처럼 여러 글을 엮어 출간하려고 했지만 원래는 '선생님의 유서'라는 이름을 가진 이 작품이 생각 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이 작품 하나만을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2. 마음
『마음』은 19세기 말 급속한 근대화를 겪고 있던 일본의 인식 변화를 다룬 작품이다. 1910년 전후 도쿄를 배경으로 화자인 젊은 청년과 그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노인의 관계를 그리고 있으며, 아직도 선생님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과거의 낙인이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모두 세 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 첫 번째 장과 두 번째 장은 선생님의 친구이기도 한 화자의 아버지의 죽음과 친구 K의 무덤을 종종 찾아오는 선생님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선생님의 비밀에 점점 신경이 쓰이는 화자는 불안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 이 편지에서 선생님은 비극적인 사랑의 삼각관계와 자기모순에 대해 고백한다. 그는 도덕과 소유욕, 이성과 감성, 삶과 죽음 사이에서 찢기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선생님의 불안정은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에 대한 증언일 뿐만 아니라 책임감과 실패로 인한 고뇌의 탐구이기도 하다. 일본 문학에서 1인칭 화법을 확립한 나츠메 소세키는 가장 위대한 일본 근대 문학가 중 한 명이다.
3. 마음 줄거리
화자인 '나'가 염세적이고 쓸쓸해보이는 사람인 '선생님'과 만나 따르게 되는 파트인 '선생님과 나', '나'가 대학교 졸업 이후 고향에 돌아가 병에 걸린 아버지를 걱정하는 파트인 '부모님과 나', '선생님'이 편지[스포일러]로 '나'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하는 파트인 '선생님과 유서' 로 나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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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나
친구의 권유로 바닷가에 놀러온 주인공은 우연히 홀로 남게되고, 가마쿠라시에서 이후 그가 선생님이라 부르게 되는 묘한 노령의 남자를 만나게 이끌리게 되며 이후 그와 자주 만나 사유적 대담을 나눈다.
부모님과 나
이후 주인공은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잠시 고향으로 내려간다. 아버지는 같은 시각 투병중인 메이지 천황을 걱정함과 동시에 그와 자신의 병세를 동일시하며 초조해한다. 형과 어머니의 권유에 일자리에 관련하여 선생님에게 편지도 보내보지만 답신은 없었다. 그 이후 선생님에게 만날 수 없겠냐는 편지가 오지만 아버지의 병세가 깊어 응하지 못한다. 때에 선생님에게 하나의 편지가 도착하고, 지금쯤에는 내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선생님의 고백을 보자마자 '나'는 집에 짧은 메모만을 남기고 전차에 올라 선생님의 편지를 하나하나 읽기 시작한다.
선생님과 유서
선생님은 학생 시절에 부모님을 잃었고 작은아버지의 후견을 받아 성장했다. 작은아버지가 현 의원을 맡고 있는데다 평소 아버지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며 칭찬을 많이 한 터라 선생님은 유산을 모두 맡기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는데, 이 양반은 나중에 선생님이 대학에 들어갈 즈음에 모든 재산을 빼돌리는 배신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세상에 믿을 놈 없다며 선생님은 인간불신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학창시절 하숙하던 집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자신이 하숙집에 데려온 절친한 친구 K 또한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자 선수를 쳐서 아가씨의 어머니에게 결혼을 승낙받는다.
이 일로 인해 K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선생님은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작은아버지와 같은 부류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결국 선생님은 평생을 절친을 배신하여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삶을 살다가 '나'에게 모든 사실을 편지를 통해 밝히고 자살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선생님은 '나'가 이 편지를 읽을 때는 자신은 이미 죽었을 거라며, 이 편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참고하도록 남기겠지만, 아내에게는 비밀로 남겨 달라며 부탁하고 선생님의 유서는 끝난다.
4. 나쓰메 소세키
1867년 2월 9일 현재의 도쿄도 신주쿠구 기쿠이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의 집안은 명문가로 이름을 날렸던 가문이었으나,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상당히 쇠락한 상태였다. 나쓰메 가문은 가구라자카에서 다카다바바에 이르는 이 일대 11개 마치(町)를 관할하는 나누시(名主) 직을 대대로 세습해 왔다. 나누시란 막부나 다이묘로부터 특정 지역의 행정 ‧ 경찰 ‧ 사법 업무를 위임 ‧ 하청 받아 수행하는 직책으로서, 대체로 그 지역의 유지가 맡았다. 담당 업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권력과 함께 급여 외의 부수적인 수입도 얻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소세키의 아버지 나쓰메 고헤이 나오카쓰 또한 그 아버지로부터 나누시 직을 물려받았다.
소세키는 나쓰메가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金之助)이다. 그가 태어난 때는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한 대혼란기였다. 1867년에 대정봉환이 선포되고 1869년 이르기까지 신정부군과 막부군 간의 내전이 지속되었다.(보신 전쟁) 막부가 붕괴하고 신정부가 대권을 잡은 이후에도 신정부가 체계를 잡을 때까지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막부의 녹을 먹던 나쓰메 가문은 가세가 기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긴노스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고품점에 양자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의 누나가 그를 데려옴으로써 그의 입양생활은 며칠 만에 끝이 났다. 낡은 가재도구를 늘어놓은 가판 옆에 밤이 늦도록 나와 있는 아기가 너무 불쌍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고헤이는 50살이 넘었고, 어머니 지에도 40살을 넘긴 나이였다. 그들에게는 그 많은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1868년, 킨노스케는 다시 시오바라 쇼노스케(塩原昌之助) 부부의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시오바라는 지금의 신주쿠 2초메(新宿二丁目)에서 나누시를 맡은 젊은이로, 어려서부터 나쓰메가의 일을 도우며 동시에 나쓰메가의 후원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시오바라 내외를 이어준 것도 나쓰메 고헤이였다. 시오바라 부부에게 긴노스케의 입양은 나쓰메가에 은혜를 갚는 일이었으며, 또한 대를 이을 아들을 들여 자신들의 노후를 대비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킨노스케는 시오바라가에서 시오바라 긴노스케라는 이름으로 유년을 보내게 되었다. 시오바라 부부는 킨노스케를 제멋대로 하도록 오냐오냐 키웠는데, 이는 나중에 장성한 그로부터 봉양을 받기 위해 계산된 행동이었다. 후에 소세키가 쓴 글들을 보면 어린 긴노스케도 양부모의 행동에 애정이 담겨있지 않았음을 알아채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시오바라 긴노스케로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면 좋았겠지만, 그가 7살 때 사건이 터지고 만다. 쇼노스케의 불륜 행각이 들통나고 만 것이었다. 부부싸움이 이어졌고, 킨노스케는 잠시 나쓰메가에 맡겨졌다. 그는 양부모에게 들은 대로 친부모를 할아버지, 할머니라 믿고 지냈다.
킨노스케는 얼마 안 있어 다시 시오바라가로 돌아갔지만, 시오바라 부부는 그가 9살 때 이혼하고 말았다. 시오바라는 불륜 사건 때문에 호장(戶長)[7] 자리를 잃게 되었다. 결국 킨노스케는 파양되어 나쓰메가로 돌아왔다. 조부모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실은 친부모였다는 것도 이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어린 킨노스케에게 충분히 충격적인 일대 사건이었지만,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불륜을 저질러서 자신이 맺어준 인연과 이혼한 것도 모자라, 일자리를 주선해 달라고 찾아온 시오바라의 뻔뻔함에 고헤이는 대노하였다. 친부와 양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 속에서도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킨노스케의 호적 문제였다.
킨노스케가 파양되어 돌아왔을 때, 나쓰메가는 메이지 유신 이전의 권세를 회복한 상태였다. 나누시가 폐지된 이후에 고헤이는 제4대구(大区)의 구장(区長)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도쿄가 6개의 대구로 편성되어 있었으니 구장이란 오늘날의 구청장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직책이었던 셈이다. 그의 권세는 그의 자택에서 카구라자카의 구청에 이르는 자신의 출근길을 나쓰메자카(夏目坂)라고 이름 붙이고, 그가 사는 동네의 행정구역명을 우물(이, 井)에 국화(기쿠, 菊)가 그려진 나쓰메 가문의 문장에서 따와서 기쿠이초(喜久井町)라 명명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친부는 킨노스케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대를 이어 고헤이의 노후를 책임져 줄 아들들이 있는 마당에 어린 긴노스케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시오바라가 이혼하여 긴노스케를 키울 수 없게 되었으니 그를 먹이고 재우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나쓰메가가 맡게 되었지만, 호적은 계속 시오바라가에 남겨두어 시오바라로 하여금 양육비를 부담하게 하였다. 시오바라 또한 이혼까지 한 처지였으니 자신의 노후를 책임져줄 킨노스케를 호적에 붙들어두려고 하였다. 따라서 긴노스케의 학비며 용돈은 모두 시오바라가 부담하였다.
양가의 의견 일치로 긴노스케는 나쓰메가에 살면서도 시오바라츠 킨노스케로 남게 되었다. 친부는 긴노스케를 조금도 아들로 대해주지 않았으니, 그는 친부모와 살면서도 남의 집에 얹혀사는 꼴과 같았다. 긴노스케가 나쓰메 긴노스케로 돌아온 것은 21살 때의 일이었다. 그것도 나쓰메가의 대를 이을 장남과 차남이 연달아 결핵으로 죽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변변찮은 3남보다 학문에 재능을 보이던 긴노스케가 탐나게 된 고헤이는, 시오바라와의 교섭 끝에 과거의 양육비 조로 240엔을 지불하고 긴노스케의 호적을 돌려받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온 것이다! 하지만 킨노스케가 소세키라는 필명으로 유명해지자 시오바라는 계속해서 그에게 돈을 요구했다. 그 후로도 아들―돈을 둘러싼 친부와 양부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소세키는 인격 형성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두 가문 사이에서 받은 고통으로 평생 정신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으로는 무너져 가는 자아를 붙들고 광기를 극복하기 위해 썼던 글들이 그를 문호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었다. 특히 친부와 양부 사이에서 거래와 흥정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은, 그를 누구보다도 예민한 근대 사회의 비판자로 만들었다.
11살의 소세키는 나이에 이미 친구들과 회람 잡지를 만들어 <마사시게론>(正成論)이라는 일본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대한 논문을 한문으로 써냈을 만큼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평소에도 한문, 한시를 애독, 애송했다고 알려져 있다.
총명하던 소세키는 제국대학의 등용문이라 통하는 대학 예비문 예과에 입학했다. 예비문 입학 전 소세키는 원래 도쿄부립 제1중학교를 다녔으나 한문을 배우기 위해 중학교를 중퇴하고 한문학 교육 기관인 니쇼학사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영어를 배워야 전망이 좋다'는 형의 권유에 따라 다시 영어를 가르치는 세이리쓰학사에 가서 영어를 공부하고 대학 예비문에 진학했다.
대학 예비문 예과 시절에 복막염을 앓아 낙제한 적도 있었지만, 추스르고 심기일전하여 결국 졸업 때까지 수석을 차지했다. 이후 대학 예비문 예과를 졸업하고 본과 영문과에 진학한다. 본과 시절에 훗날 근대 하이쿠를 발전시킨 마사오카 시키와 교우하면서 '소세키'라는 아호를 쓰게 되었다. 마사오카의 영향을 받아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하이쿠에 심취했다. 이어서 제국대학 영문과에 진학했다.
1892년에는 분가와 동시에 본적을 홋카이도로 옮기고 그해 5월 도쿄전문학교의 강사로 출강했다.
1893년에 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학 강사와 중·고등학교 선생을 했으며, 이때의 경험이 그의 작품 세계에 자주 드러난다. 1896년에 귀족원 서기관장[13]인 나카네 시게카즈의 딸 교코를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1900년 문부성의 국비유학생 1호가 되어 영국으로 2년간 유학을 떠난다. 원래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등록할 예정이었으나 포기하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영문학 강의를 청강했다. 하지만 유학 비용 부족과 고독감으로 신경쇠약과 위궤양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영국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방대한 소설과 시를 읽다가, '무엇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애당초 인간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고민했다. "소세키가 한밤중에 불도 켜지 않고 흐느껴 울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하고 일본인 친구는 글로 남겼다. 소세키는 영국 런던 유학 중에 신경쇠약, 특히 감시공포증에 시달렸다. 또한 독일에서 온 유학생 이케다 기쿠나에[15]에게 영감을 받아 과학이란 학문에 심취하기도 하고, 홀로 영문 모를 연구에 몰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케다가 일본 정부에 보낸 전보에 한 마디로 요약되었다. "나쓰메 미쳤다." 정부로부터 귀국하라는 연락이 왔지만, 일단 할 일은 다 마친 뒤에 귀국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얻은 신경쇠약 증상은 귀국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사실상 소설을 창작한 것 자체가 이 신경쇠약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도피 행위였다고도 한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영국 유학시절에 런던 탑을 관광하며 느꼈던 감정을 단편소설 <런던탑>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영국 유학 기간 동안에는 다니던 학교도 휴직하여 연봉이 적게 나왔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빚도 많이 졌으며 양부와 유학 즈음에는 완전히 몰락한 처가까지 부양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가 유학 중에 100엔, 일본에서 머물던 시절에 100엔, 귀국해서 100엔 정도 빚이 있었다. 이 당시 목수의 하루 일당이 1엔, 임시 교사의 월급이 8엔이던 시절이다. 특히 장인 나카네 시게카즈가 고위 관직에 있었던 터라 상당한 원조를 받았었지만, 나쓰메 소세키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직후에 정권이 교체되면서 물갈이를 당해서 관직을 박탈당한 데다가, 손을 댔던 주식까지 폭락하는 바람에 거액의 빚을 지어 사위 나쓰메에게 원조를 끊었다. 경제적으로 상당 부분을 장인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나쓰메 부부의 가계도 더불어 파탄이 난 것. 결국 제1고등학교 강사,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강사를 겸임했고, 메이지대학에도 출강하며 벌이를 늘렸다. 이 와중에도 자신의 신경쇠약을 다스리고 잔돈푼도 좀 벌어볼 목적으로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 다른 일이란 바로 문예지에 첫 작품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한 것이다. 처음에는 1화 분량의 단편으로 기획되었으나 반응이 좋아 계속 연재하였다. 처음 작품을 연재한 지면은 하이쿠 잡지인 <<호토토기스>>. 앞에서 언급한 <런던탑> 등 다수의 단편을 발표하고 1906년엔 단편집을 출판함과 동시에 2번째 장편 작품인 <도련님>을 <<호토토기스>>에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7년에 드디어 교직을 전부 사직[18]하고 1년에 100회가량 연재 소설을 쓰는 조건으로 아사히 신문의 전속 작가가 된다. 1909년에는 대학 시절 친구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대로 조선과 만주 일대를 여행하고 그 여행기인 <만한 여기저기(満韓ところどころ)>를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1911년에는 문부성에서 문학박사 학위 수여를 통보받았으나 거부했다.
1916년에 지병이 악화된 탓에 188회를 마지막으로 <명암>의 연재를 중단했다. 결국 그해 12월 9일 위궤양 악화로 인한 내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49세. 사망 익일 시신은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해부학실에서 병리학자 나가요 마타오에 의해 부검[19]되었는데 이때 적출된 뇌와 위가 기증되어서, 뇌는 에탄올에 잠긴 상태로 현재까지도 도쿄대학에 계속 보관되었다고 한다.
3. 영향력
일반적으로 나쓰메 소세키는 근현대 일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로 여겨진다. 윤상인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는 "나쓰메 소세키는 한 마디로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영웅"이고 "그의 텍스트가 일본 국민의 의식을 만들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라고 평했다. 그의 영향력은 거의 모든 일본 중요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 모리 오가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요코미쓰 리이치, 가지이 모토지로, 무라카미 하루키, 에토 준 등이 있다. 심지어 중국 작가 루쉰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목요회를 열어 당대, 특히 다이쇼 시절 이름을 날린 작가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다.
일본의 셰익스피어, 현대 일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이름난 문학 평론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소세키론을 쓸 만큼 현대 일문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는 작가다. '언문일치'를 주장한 후타바테이 시메이와 함께 현대 일본 순수 문학의 본령인 사소설이라는 체계를 최초로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그는 일본의 근현대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일어일문학과 학생들에게는 영어영문학과의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수준의 입지로, 멀리 갈 것도 없이 국내에 많이 알려진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읽어보면 이 사람이 일본 문학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이 작가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드러나는 재미있는 사례로는, 나쓰메의 소설을 연구한 사람이 나쓰메 소세키론을 썼는데, 시간이 흘러 몇십 년이 흐르자 그 소세키를 연구한 사람을 연구한 사람이 나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소세키 연구 일대기를 연구하기도 한다. 메타메타 평론 게슈탈트 붕괴 평론
쉽게 설명하면, 기존의 일본 문학은 배운 사람이나 이해하는 어려운 한문체 말투로 쓴 소설이었는데, 영국으로 유학까지 가서 영문학을 전공한 나쓰메 소세키가 영국 문학에서 배운 일반 대중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쓴 언문일치체로 썼다. 그것도 일본어가 가진 리듬감을 살려서 소리내서 읽으면 더 재미있는 만담. 일본의 전통 예능 라쿠고와 강담 스타일을 글로 썼다. 한국으로 치면 판소리 사설체를 글로 그대로 옮겨 적은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 이것은 현대 일본인이 그의 소설 원문을 읽어도 불편함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모던) 문학으로 분류하는 기점이 됐다. 일반 대중 시민이 읽는 신문에 연재했기 때문에 신문 독자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체가 필요했다. 같은 시기 신문에 연재됐던 이수일과 심순애의 원작이 된 <金色夜叉, こんじきやしゃ>(1897년~ 1902년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 도 마찬가지로 일반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언문일치 소설이었다. 일본 문학사적으로는 언문일치를 이룩한 혁명적인 인물이다.
또 소세키는 한국 문단에도 큰 영향을 줬다. 소세키의 작품은 이광수, 염상섭 등 1910년대, 20년대 한국 문단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산시로』의 산시로가 도쿄로 상경하는 기차 안에서 변화하는 일본 사회에 대해 인식하게 되는 것을, 염상섭의 『만세전』에서 이인화가 조선의 현실을 묘지로 인식하게 되는 것과 비교해 보는 등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4. 특징 및 성향
사실 소설의 대부분이 그것을 쓴 작가 본인이 강하게 투영되는 경향을 보여주기는 하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구샤미 선생이나 <도련님>의 화자는 작가와 사실상 동일 인물이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로 작가의 삶과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일단 두 작품 다 화자나 중심 인물의 직업이 선생이다. <도련님>의 배경은 시코쿠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이다.
초기 단편소설인 <런던탑>은 런던 유학 시절 작가 본인의 경험을 풀어낸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쓴 것이라면 에세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런던탑에서 작가 혼자 리처드 3세가 어린 왕 형제를 런던탑에 가둔 일이나 제인 그레이가 처형당한 일 등 영국사를 바탕으로 신나게 공상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런던탑이라는 작품 앞부분에 당시의 궁핍한 유학 생활 실태가 묘사되어 있다. 그의 작품이 근대화에 비판적인 것도 이때 근대화 1번지인 영국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개고생한 탓인 듯.
작품생활 전반기 작품과 후반기 작품의 분위기가 정말 크게 다르다. 초기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도련님>처럼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며 유머러스한 작품들이 많았다면 후반기엔 그의 대표작인 <마음>을 비롯하여 전부 인간의 내적 갈등을 다룬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이 다수이다. 그래서 초기 작품을 읽고 이어서 후기 작품을 읽거나 혹은 그 반대로 읽으면 기분이 다소 묘하다. 그 이유는, 전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인 <문(門)>을 집필하던 1910년 6월, 위궤양으로 입원. 8월에 이즈의 슈젠지 온천에서 요양생활을 하던 중, 800그램의 피를 토하고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슈젠지의 중병(修善寺の大患)'을 겪는다. 의사의 기록을 보면 약 30분간 죽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때의 죽음의 체험과 병상에서의 생활은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준다. 전기에는 작품 속에서 죽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후기의 작품에는 병고에 시달리는 인물과 자살하거나 죽는 사람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후기 작품에선 대체로 삼각관계를 바탕으로 그 관계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 각 개인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본격 아침 드라마 연애 소설 작가로 거듭난 것인가 싶겠지만, 사실 대놓고 연애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고 끓어오르는 연애 감정과 배덕감 등으로 고뇌하는 개인의 모습을 조망한다.
그의 탐미주의적 작품에서 대체로 인텔리, 지식인 출신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당연히 그의 출신 탓이겠지만. 연구자들은 소세키를 통해 근대 지식인 유형을 연구하기도 한다. 1908년에 연재한 <산시로>, 1909년에 연재한 <그 후>, 1910년에 연재한 <문>의 세 작품들은 연재 순서뿐만 아니라 내용, 작중 배경이 어느 정도 연속성이 있어서 소세키 연구자들 중엔 이 세 작품을 일종의 3연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제목을 밋밋하게 짓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 제목이 장황하지 않고 간소하며, 작품 내용과도 그렇게까지 크게 관련이 없는 것을 제목으로 삼곤 한다. 심지어 이듬해 춘분까지 연재한다고 <춘분 무렵까지>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도 있다.
소세키의 문학관은 '좌국사한'(춘추좌씨전 국어 사기 한서)에서 터득됐다고 한다. 웅숭 깊은 동양 고전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근대적 불안과 고뇌'를 깊게 응시했다. 그는 영국 유학을 갔는데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이보다 진지했던 적은 없다'라며 영국 인상을 작품 '런던 소식'에 적어 놓았다. 그 충격이 근대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어진 것이다.
소세키의 소설의 장점 중의 하나는 독서가 취미가 아닌 사람도 이해가 잘될 정도로 술술 읽힌다는 점이다. 또 그가 사망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전혀 세월이 느껴지지 않고 현대 문학 같다는 평도 많다. 소설가 고바야시 교지(小林恭二)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전혀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가히 기적이다."라고 평했다. 일본 문학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소세키만큼 다양한 장르와 문체를 구사한 작가는 일본뿐 아니라 외국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4.1. 주변국 국민 비하
제국주의 시대의 인물이지만 딱히 작품이나 글 등에서 제국주의나 인종주의 등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 편. 다만 <만주와 한국 여기저기(滿韓ところどころ)>에서 중국인이나 한국인을 비하하는 발언들이 단편적으로 등장하기는 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고 보기에는 부족하지만, 주변 나라들을 그가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중략) 인력거는 일본인이 발명한 것이지만 끄는 사람이 중국인이나 조선인인 경우에는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 그들은 어차피 남이 만든 것이라는 생각으로 털끝만큼도 인력거에 존경을 표하는 방식으로 끌지 않는다. 고려의 고적지를 보러 갔을 때는 엉덩이가 방석 위에 닿을 틈이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결국 조선인의 머리를 탁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험한 대우를 받았다. 끄는 방법에 기술이 없어 단지 무턱대고 달리기만 하면 능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점에서 완전히 조선식이었다.
<만주와 한국 여기저기(1909), 서은혜 외 <일본문학의 흐름(2007)>에서 번역문 재인용
승객의 불편을 헤아리지 않고 무작정 끌고 달리는 점을 문제삼아, 인력거를 끈다는 행위에 어떠한 존경도 없이 텅 비어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차별적 언행이 꽤 발견된다고 위 글을 번역 출간한 김유영 동덕여대 일본어학과 조교수가 지적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반전주의와 천황제 비판을 보이면서도 일본인들은 자랑스럽다, 영국인들은 당당하다, 러시아 건축물은 훌륭하다 하면서 피식민지 하층민은 더럽다, 불쾌하다 하여 기존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인터뷰도 했다.#
<만주와 한국 여행기>의 다른 내용을 기사에서 언급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안에 늘어선 대부분은 중국인, 인도인 쿨리였다. 한 명도 더러운데 둘 이상이 모이니 더욱 볼꼴사나웠으며 거북하다. 인력거도 모두 저 소란스러운 패거리들이 끌었고 내지(일본)보다 느낌이 안좋다.(24쪽부터)" 또한 일본 소설 <암살>에서 인용한, 나츠메 본인이 '만주일일신문'에 기고한 <한만소감-하> 역시 이런 시각이 보인다. 요약하자면 "일본인으로 태어난 것은 다행이다. 일본인이 제일 불쌍한 줄 알았는데 만주, 조선에 있다 온 동포가 문명 사업에서 활약하고 우월한 존재가 된 것을 보면 일본인도 믿음직하다. 난 중국인이나 조선인으로 안 태어나서 다행이다. 그들 앞에서 승자의 패기를 가지고 일하는 동포는 운명의 총아이다."라는 내용.
4.2. 기타
말년의 작품인 <점두록>에서는 반군국주의적 작품 성향을 보였는데, 1차 세계대전에 주목하여 전쟁이 부른 참상을 지적했다. "저 탄환과 저 화약과 저 독가스와 그리고 저 육탄과 선혈"이라 묘사하며 전쟁에 항변하는 모습을 보였고, 트라이치케를 예로 들어 독일 군국주의가 어디까지 성장하여 통일 독일까지 이루어 내었는지를 상세하게 살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군국주의자와는 다소 거리가 먼, 반군국주의자, 평화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의 단어량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소세키 전집을 번역한 번역가 송태욱은 “소세키 번역은 다른 책보다 3배나 더 걸렸죠. 뒤로 가도 2배는 더 걸린 것 같아요. 단어량이 (일본) 현대 작가에 견줘 10배 이상 많아요. 한자 가운데 유일한 용례가 소세키 것인 경우도 종종 있어요. 미시마 유키오의 단어량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소세키에는 미치지 못하죠.”라고 말했다.
또 소세키는 평소 한문과 한시를 애송했고 조예 또한 깊었다. 한자 조어 역시 많은데 신진대사(新陳代謝) 등의 한자를 조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출처가 불명이다. 무의식(無意識), 가치(價値) 등은 근대 일본에서 만들어졌거나 뜻이 덧붙여진 일본식 한자어인 것은 맞으나, 소세키의 조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저회취미(低徊趣味)'라는 고유한 한자어도 소세키의 조어다. 그 밖에 아테지(当て字)라고 하는, 고유어, 서구 외래어 등 본래 한자어가 아닌 낱말을 그럴듯하게 한자로 적는 방식도 애용했는데 현재에도 쓰이는 '낭만(浪漫)'이 그런 사례이다. 프랑스어 '로망'을 제대로 옮길 말이 없어서 '낭만주의'라는 한자로 음차하여 옮겼다고 스스로 밝혔다. 浪漫은 일본어 발음으로는 '로만'이다. 일본어의 도니카쿠(兎に角: 어쨌든), 다쿠산(沢山: 많이, 잔뜩) 등 소세키가 사용한 아테지 중 일부는 지금도 쓰이고, 한자어 역시 쓰이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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