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을 읽고
우연찮게 얼마 전에 읽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과 비슷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 같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하는 것과 같이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는 본인이 인간실격자라는 고백을 하고있다. 저자 다자이 오사무는 절망과 고독의 인간 본질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책 마지막 부분에서 오바 요조는 이것도 지나가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절망과 고통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인간 삶의 고통과 절망, 고독 그리고 인간 존재감의 상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 부자집 아들로서 너무나 순수했던 주인공이 무력하게 삶의 무게에 무너져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주인공 오바 요조의 고통과 고독은 인간과의 신뢰의 부재에서 기인하였다. 더군다나 주인공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온전하게 존재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인간에게 호소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절망하였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것이다. 사람과의 신뢰를 어떻게 회복해 나가야 할 지 우리 모두 고민해 보아야할 것이다. 짧은 사람의 인생은 영원이라는 시간 앞에 이방인이다.
사람과의 만남에는 환희가 있어야 하며 이별에는 슬픔이 있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관계는 인간 실격의 삶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영혼과 가슴의 교류가 필요하다.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진실된 어울림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삶을 살기위한 성찰을 하며 인간답게 살려고 하면 할 수록 인간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성찰하며 생각할 수록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비인간적이고 허위 적인 것을 자각하며 자기자신에 대해 실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죽음의 유혹에 빠져들었고 실제로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5번의 자살 시도 끝에 39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인간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려던 주인공 오바 요조는 마지막에 자기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배신을 당한다. 오바요조는 이러한 상황을 신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신뢰는 죄가 되나요?’
인간 실격 줄거리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인간의 계산적인 선행과 위선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주인공 오바 요조가 방탕한 삶을 살다가 몰락하는 내용이다.
작중 오바 요조의 수기로 나오는 것은 '제1의 수기', '제2의 수기', '제3의 수기'로, '서문'과 '후기'에서는 '나'의 체험담이 쓰여 있다. 처음 '제1의 수기' 원고에서 주인공의 일인칭은 '저(私)'였다가 도중에 다시 쓰여 '자신(自分)'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수기 전체의 일인칭으로 쓰인다.
서문
나는 그 사내의 사진 세 장을 본 적이 있다.(私は、その男の写真を三葉、見たことがある。)
이 첫머리로 시작되는 문장은 유년시절, 학생시절, 기괴한 사진으로 되어 있는 세 장을 비교하고 있으며, 그 모습이 제3자의 시점으로 쓰여 있다.
제1의 수기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恥の多い生涯を送ってきました。)
이 수기의 화자 오바 요조는 남들과는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혼란스럽다 못해 발광할 지경에 이른다. 그렇기에 남들과 제대로 대화도 못하는 요조는 인간에 대한 최후의 구애로서 광대를 연기한다. 하지만 말싸움도 자기변명도 못하는 그의 본성은, 하녀와 하인에게 성추행을 당해왔다는 어른들의 잔혹한 범죄를 말하지도 못한 채 힘없이 웃는 인간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속이면서도 '맑고 밝고 명랑하게', 또는 살아갈 자신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난해함 끝에 아무한테도 호소하지 않는 고독을 선택해왔다.
제2의 수기
중학교 시절, 요조는 광대 노릇을 하던 자신의 본모습을 눈치챈 급우, 다케이치로 인해 공포를 느낀다. 그 후, 구제고등학교에서 인간을 향한 공포를 달래기 위해 악우 호리키의 권유로 소개받은 술과 담배와 매춘부, 그리고 좌익사상에 빠져든다. 이들은 전부 그에게 추악하게 보이는 인간의 굴레에서 잠시나마 해방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급격히 환경이 변하며 여러 속박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지자, 결국 한 유부녀와 훈훈한 하룻밤을 보낸 후 동반 자살을 감행한다. 하지만 요조 혼자만이 살아남아 자살 방조죄로 인해 심문을 받았다. 기소유예가 되어 아버지와 거래 관계인 히라메라는 남자를 보증인으로 석방되지만, 그의 혼란한 정신 상태는 계속된다.
제3의 수기
처벌을 빌미로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그는 잠시 넙치의 집에 체류하게 되지만, 그가 장래에 어떻게 할거냐고 따지면서 갈등 끝에 결국 가출해버린다. 이를 계기로 애 딸린 여성, 바의 마담 등 다른 여자와의 파괴적인 여성관계를 맺게 되었고, 요조는 더욱 깊은 절망의 늪에 서게 된다. 하지만 호리키를 통해 '세간이란 개인이 아닌가'라는 사상같은 것을 가지고 나서 세상에 대한 경계가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만화를 연재한 그는 루바이야트의 시구를 삽입하게 된다. 그러다 술을 관두라는 한 순진무구한 여성을 알게 되고, 결혼하여 한동안이나마 행복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 죄의 반댓말에 관해 호리키와 대화하면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머리를 스쳐지나간 직후, 그 여성은 단골로 드나들던 상인에게 덮쳐진다. 처참한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절망에 겨워 알코올에 빠져있던 그는, 그만 어느 날 저녁 우연히 그녀가 비밀리에 준비해뒀던 수면제를 써서 또다시 자살미수를 일으킨다.
어떻게든 살아나긴 했지만 그 후 몸이 쇠약해진 데다 술을 끊지 못하여 대설이 내리는 밤 도쿄에서 각혈을 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점은, 쓰네코와의 동반 자살 사건 직후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가짜로 각혈을 연기하여 처벌을 면한 적이 있다. 약국에서 정 술을 끊기 힘들 때 쓰라고 처방받은 모르핀을 주사하자 급격히 상태가 회복되었으나, 그에 맛들린 나머지 몇 번이나 남용하다 그만 모르핀 중독에 걸린다. 처음 줄 때도 종이에 급하게 싸서 건네고 계속 모르핀을 제공하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경찰이 귀찮게 한다는 언급으로 보아 정에 이끌려 불법적으로 준듯하다. 약국에서 계속 외상으로 약을 사는 동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 되었고, 그만 약국의 부인과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자신의 죄를 견디지 못한 그는 스스로 친가에 상황을 설명하고 돈을 꿔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이윽고 가족의 연락을 받은 듯한 넙치가 호리키를 데리고 찾아와 병원에 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정작 몸도 마음도 붕괴되어 훌쩍이며 그 제안에 이끌려 요조가 입원한 곳은 결핵 요양소가 아닌 정신병원이었다. 남들이 자신을 미치광이로 보는 것을 깨달은 요조는 이미 자신은 인간 실격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인간, 실격.(人間、失格。)
수 개월의 입원 생활 후 고향에 거두어진 요조는 폐인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고, 불행도 행복도 없이 노파에게 희롱당하며 시간이 지나간다. 이는 지금까지 아비규환에서 살아왔던 이른 바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하나의 진리라 여겨졌다. 실제 나이 27세인 그였지만, 머리도 하얗게 새어버린 바람에 40세 이상으로 보인다는 말로 자백은 끝을 맺는다.
후기
후기에서 '나'가 마담과 만나 소설의 소재로 제공 받은 오바의 수기와 사진을 보고, 그 기괴함에 열중한다. 이후 '나'가 마담에게 요조의 안부를 묻자 알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마담은 아버지의 잘못이라 하고는 요조를 '하느님 같은 착한 아이'라고 말하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다자이 오사무
유년 시절
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 6월 19일 아오모리 현 기타쓰가루 군(郡) 가나기 마을의 대지주인 쓰시마 가문에서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1남매 중에서 10번째였다. 그의 아버지 겐에몬은 기즈쿠리 마을의 부농인 마쓰모토 가문에서 온 데릴사위이며, 현회 의원, 중의원 의원, 귀족원 의원 등을 지낸 지역의 명사였다. 쓰시마 가문은 가나기에서 영향력 있던 유지 집안으로 30여 명의 하인들이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아버지는 늘 바깥일로 바빴고, 어머니는 병약하여 그는 태어나자마자 유모에게 맡겨졌다. 또,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가 정치가였던 남편 겐에몬과 함께 외출하는 일이 잦아 다자이 오사무는 숙모인 기에(きゑ)의 손에 자랐고, 하녀 지카무라 다케(近村タケ)가 보모를 대신했다. 그는 2살부터 6살이 될 때까지 다케와 함께 지냈다. 즉, 낮에는 다케의 보살핌을 받고, 밤에는 숙모 기에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다자이 오사무가 5살이 되던 해, 할머니 이시(いし)는 다케에게 쓰시마 가문의 사찰인 보다이지(菩提寺)에서 열리던 일요학교1)에서 책을 빌려오게 하여 손자에게 읽도록 하였다. 이때 그는 이미 묵독하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 혼자서 많은 책을 읽었다.
그러던 중 숙모 기에의 가족이 고쇼가와라시(五所川原市)로 분가를 하면서 다케도 따라갔다. 소년 다자이 오사무도 같이 갔지만 곧 소학교에 입학하면서 다시 가나기로 돌아왔다. 이처럼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다.
학생 시절 - 문학에 눈뜨다
1916년 가나기 제1진상소학교에 입학한 다자이 오사무는 1922년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자이의 학업성적을 걱정한 아버지 겐에몬은 그의 학력을 보충하기 위해 지방 사무조합에서 운영하던, 조합립메이지고등소학교에 입학시켜 1년간 다니게 하였다. 그는 재학 중 친척이었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방과 후에는 국어, 산술 등의 과목을 개인 지도도 받았다. 이 무렵 도쿄에 가 있던 아버지가 유행성감기로 병원에서 사망하고, 장례식을 준비하던 중 소학교 은사이자 친척인 소바시마 마사모리의 손에 이끌려 아오모리중학교에 입학 시험을 치렀고 합격하였다.
1925년 중학교에 입학한 후 먼 친척인 도요타 다자에몬의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 그의 당시 동급생으로는 훗날 그의 소설 『쓰가루(津軽)』에 N으로 등장하는 나카무라 데이지로와 일본 화가 아베 고세이 등이 있었다. 그는 17세 즈음에 습작물인 「마지막 타이코(最後の太閤)」를 동인지에 발표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신기루(蜃気楼)』, 『별자리(星座)』 등의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삶에 뜻을 두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5년제인 중학교 전과정을 4년 만에 수료했다.
1927년 다자이 오사무는 관립 히로마에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먼 친척인 후지타 도요사부로의 집에서 하숙하며 통학했다. 이때부터 이즈미 교카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에 심취하였고, 좌익 운동에 열중하면서 잡지 『전기(戦旗)』를 애독했다. 그러던 중 존경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에 빠져 학업을 접고, 1년간 일본 전통음악인 조루리(浄瑠璃) 기다유(義太夫)를 배워 화류계에 입문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때 아오모리에 있던 한 요정에서 15세의 게이샤, 오야마 하쓰요를 만났다.
다자이 오사무는 1929년 당시 유행하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영향으로 동인 잡지 『세포문예(細胞文芸)』를 창간하여 단편 소설 「무간나락(無限奈落)」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좌표(座標)』에 지주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지주일대(地主一代)」를 발표하는 등, 자신의 출신 계급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수면제인 칼모틴을 다량으로 먹고 자살을 시도해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4~5일 후 의식을 되찾은 그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오오와니 온천의 여관에서 요양을 했다. 그 뒤 193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때 그의 성적은 졸업생 76명 중 46등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습작은 중고등학교를 통틀어 200편에 이른다.
1930년 다자이 오사무는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공부보다는 단순히 불문학에 대한 동경으로 입학한 터라 프랑스어를 모르던 그가 강의 내용을 이해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집에서 보내오는 돈으로 화려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자신을 경멸하였다.
한편 그는 애인이었던 오야마 하쓰요가 그녀 고향 유지의 첩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동요하여 그녀를 도쿄로 데려왔다. 명문가의 아들이 게이샤를 불러들였다는 소문이 다자이 오사무의 고향에 퍼지면서 소동이 벌어졌는데, “모든 친척들을 놀라게 하고 어머니에게 지옥의 고통을 맛 보게 했다”라고 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오야마 하쓰요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다자이 오사무의 맏형이 상경하여 “(하쓰요가 게이샤이더라도) 결혼은 인정하지만 집안에서 제적시키겠다”며 그들의 관계를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형과 하쓰요는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에서 이름을 빼 분가를 했고, 비로소 ‘다자이’라는 이름으로 오야마 가문에 폐백을 보냈다.
그 사이 도쿄에 남아 있던 다자이 오사무는 긴자에 있던 술집 ‘헐리우드’에서 유부녀인 여종업원 다나베 아쓰미2)를 만났다. 그들은 함께 3일을 지낸 후, 가마쿠라로 가서 다량의 칼모틴을 복용하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신음 중인 상태로 발견되었다. 결국 아쓰미는 죽고 다자이 오사무는 시치리가하마의 요양소에 수용되었다. 그 후 그는 요양 차 머무르던 아오모리의 시바타 여관에서 오야마 하쓰요와 약식 결혼식을 올렸다.
다나베 아쓰미
대학 시절 다자이 오사무는 6번째 아들이라는 애매한 사회적 위치와 지주 집안이라는 굴절된 죄책감으로 자기혐오에 빠져 점점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였다. 당시 치안유지법 단속 대상이었던 공산주의 활동에 몰두하였고, 반제국주의 학생 연맹에 가담하는 등 수업 시간에는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집을 근거지로 하여 조직의 기관지를 인쇄하거나 중앙위원회 회의 장소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 자신도 전단을 뿌리거나 조직 운영을 위한 모금 운동을 하였다. 급기야 아오모리 현의 고향 집에까지 경찰들이 찾아갔고 그의 좌익 활동을 가족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당시 현의원이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맏형은 분개하여 “아오모리 경찰서에 출두하여 좌익 운동에서 이탈할 것을 서약하지 않으면 (송금을 중단하고) 모든 인연을 끊겠다”는 내용을 편지에 적어 그에게 보냈다. 이로써 다자이 오사무의 3년간 좌익 운동은 끝을 맺었다. 당시 그는 조직의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자괴감이 컸다고 한다.
이후부터 다자이 오사무는 본격적으로 소설가가 되기 위해 작가인 이부세 마스지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으며, 본명인 쓰시마 슈지 대신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단 가즈오, 나카하라 주야 등과 함께 동인 잡지 『추억(思ひ出)』을 창간하는 등 집필 활동에 몰두했다.
유급을 거듭하던 다자이 오사무는 대학 졸업이 어려워지자 1936년 미야코 신문사 입사 시험에 응시했다. 그러나 불합격했고 그 충격으로 3월 16일 밤 혼자 가마쿠라 산으로 가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집안에서는 다자이 오사무의 실종 신고를 한 상태였는데 결국 그는 스스로 귀가했다. 그 직후 맹장염과 복막염이 겹쳐, 진통을 누그러뜨리고자 마취약인 파비날을 사용했는데 이를 계기로 약물 중독에 빠지고 말았으며, 게다가 수업료 미납으로 대학에서 제적되었다.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
다자이 오사무는 유독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존경하였다. 1935년 잡지 『문예』에 발표한 그의 작품 「역행(逆行)」은, 새로 창설된 제1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작 5편에 이름을 올렸다가 낙선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때 선고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작자는 현재의 생활에 어두운 구름이 끼어 있어, 재능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사생활에 대한 평가를 하였다. 이에 대해 다자이 오사무는 문예잡지에 「가와바타에게」라는 글을 써서 “새나 키우고 무용이나 보는 것이 그렇게 훌륭한 생활인가”라며 되받아 공격하기도 하였다.
제2회 아쿠타가와 상 시상식에서 사토 하루오는 자신의 문하생이 된 다자이 오사무를 강력하게 지지했으나 또다시 낙선했다. 다자이 오사무는 27세가 되던 해에 “유언을 쓰는 마음으로 썼다”는 그의 첫 단편집 『만년(晩年)』을 발표하였다. 그는 아쿠타가와 상 선고에 앞서 가와바타에게 책을 보내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첨부했다. “부디 저에게 (아쿠타가와 상을) 주십시오. 바라는 것은 일절 없습니다. 깊은 경의와 비밀스러운 혈족감이 이와 같은 부탁의 말씀을 드리게 한 것 같습니다. (중략) 저에게 희망을 주십시오. 저에게 명예를 내려 주십시오. (중략) 『만년』 이 한 권만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분명 괜찮은 작품일 것입니다.”
이 글은 다자이 오사무가 깊이 숨겨 두었던 속마음을 모두 드러내 직설적으로 애원하며 쓴 것이었다. 그는 도쿄에 상경한 이후, 동반자살을 감행하였으나 자신만 살아 남았으며, 가족조차 반기지 않은 화류계 여자와 결혼했으며, 비합법 활동을 하고, 대학 조차 졸업하지 못해 취직도 실패하는 등 고향의 가족들에게는 민폐만 끼친 자신의 지난 일들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고픈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약물 중독 덕분으로 인해 불어난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상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후보작으로 지명되었던 작가는 선고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이 생기면서 후보조차 되지 못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약물 중독 증세가 더욱 심해지자 걱정하던 이부세 마스지와 주위의 동료들은 ‘결핵을 치료하기 위한 요양’이라고 속이고, 그를 무사시노 병원의 정신병 병동에 입원시켰다. 그는 한 달 후에 완치하여 퇴원했는데, “나를 인간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고 했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이 체험을 바탕으로 8년 후 『인간실격(人間失格)』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다자이 오사무가 퇴원하자 그의 내연의 처 오야마 하쓰요는 그 사이 다른 남자와의 불륜을 고백했다. 이에 대한 충격으로 그는 하쓰요와 함께 다니가와다케(谷川岳) 기슭의 온천에서 칼모틴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또다시 실패하였다. 그 후 그는 1년간 집필 활동을 중단했고, 오야마 하쓰요와는 헤어졌다.
결혼에서 죽음까지 - “부끄러움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1938년 다자이 오사무는 스승이었던 이부세 마스지의 초대로 후지산이 보이는 야머나시 현 덴카차야(天下茶屋)에 들어갔다. 그해 이부세의 집에서 고등학교 교사인 이시하라 미치코를 만나 결혼한 뒤, 고후(甲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다자이 오사무는 결혼할 때 이부세 마스지에게 “다시 파혼을 반복한다면 나를 완전 미친놈으로 보고 버려주십시오”라며 <결혼서약서>를 제출했다. 이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실수들을 다시 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미치코를 지키며 평생 함께하겠다는 결의의 표시였다.
다자이 오사무는 결혼을 기점으로 비로소 정신적인 안정을 찾으면서 연간 발표 작품 수가 증가하였다. 이듬해에는 미타카 지역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장녀 소노코(園子)가 태어났다. 이 무렵 그가 집필한 소설로는 「부악백경(富嶽百景)」, 「직소(駆け込み訴へ)」, 「달려라 메로스(走れメロス)」 등 밝은 분위기의 작품성이 뛰어난 단편들이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고향에 있던 어머니 다네가 너무 쇠약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하기 위해 10년 만에 혼자서 귀향하여 할머니 이시와 둘째 형 에이지(英治), 숙모 기에와 재회하였다. 1942년 어머니가 중태에 빠지자 쓰시마 가문의 권유로 아내 미치코와 장녀 소노코를 함께 데리고 귀향하여 고향의 가족들과 처음으로 대면하였다. 그리고 도쿄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혼자서 귀향하였는데, 어머니 다네는 향년 70세로 눈을 감고 말았다. 이듬해 천도재를 위해 다시 가족과 함께 귀향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집필 활동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그 중 「불꽃놀이(花火)」는 당국 검열에서 “시국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체 삭제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1944년에는 오야마 서점의 가노 쇼키치(加納正吉)의 권유로 고향에 대한 향수를 엮은 소설 「쓰가루」를 집필하였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그는 그해 5월 쓰가루 지역으로 취재 여행을 다녀와 7월에 완료했다. 또 그해 장남 마사키(正樹)가 태어났다.
점차 미군의 공습이 심해지자 다자이 오사무는 고후의 처가로 가족들을 대피시키지만, 1945년 7월 고후마저도 공습을 받자 가족을 다시 쓰가루로 데려와 형 분지(文治) 부부가 살던 집에서 생활했다. 그는 이곳에서 22개 작품을 완성하였고, 일본의 패전을 맞는다.
패전 후 다자이 오사무는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와 교류했는데, 이들을 가리켜 무뢰파(無頼派) 또는 신게사쿠파(新戯作派)라 불렀다. 1947년 둘째 딸 사토코(里子)3)가 태어났고, 같은 해 가인(歌人)인 오오타 시즈코 사이에서는 하루코(治子)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해 그는 몰락한 화족(華族)의 생활상을 담은 장편 소설 『사양(斜陽)』을 발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오오타 시즈코는 이 소설의 실제 등장인물이기도 했으며, 당시 이 소설의 영향으로 ‘사양족’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등 다자이 오사무는 명실상부 인기 작가의 자리에 올랐다.
오오타 시즈코
1948년 다자이 오사무는 미타카 역 앞의 우동집에서 전쟁 미망인 야마자키 도미에를 만났으며, 그녀의 헌신적인 간호를 받고 영양 주사를 맞으면서 소설 『인간실격』을 탈고하였다. 또, 소설가 시가 나오야를 비롯한 기성 문단을 통렬하게 비판한 「여시아문(如是我聞)」을 발표하였다.
야마자키 도미에
한편 다자이 오사무는 「버찌(桜桃)」, 미완의 유작 「굿바이(グッド · バイ)」 등을 집필한 후 1948년 6월 13일, 가벼운 평상복 차림으로 집을 나가 애인이었던 야마자키 도미에와 다마가와 강에서 투신자살하였다. 그의 책상 위에는 「굿바이」 원고와 아내에게 남기는 유서, 자녀들을 위한 장난감을 놓여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와 도미에는 기모노 끈으로 서로 묶여 있었으며, 이들의 유체는 투신한 지 6일 후인 6월 19일, 공교롭게도 다자이 오사무의 생일에 발견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향년 38세였다. 훗날 다자이 오사무와 같은 고향 출신으로 친교가 있던 소설가 곤 간이치는 이날을 ‘앵도기(櫻桃忌)’라 이름 붙였다. 이는 다자이 오사무가 죽기 직전에 쓴 단편 소설 「버찌」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다자이 오사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억측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50회 앵도기를 앞두고 공개한 유서에 따르면, 아내 미치코에게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라고 남긴 데 이어 “소설을 쓰는 것이 싫어졌기 때문에 죽습니다”라며 자신의 자살 이유를 밝히고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풍
다자이 오사무는 심각한 내용에서부터 가볍고 유머러스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창작하였다. 예를 들면 소설 「여학생(女生徒)」은 여성 화자 1인칭으로 이루어져 있고, 「여자의 결투(女の決闘)」에서는 작품 속에 갑자기 작자 자신이 등장한다. 「광대의 꽃(道化の華)」은 유사한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독자들의 상상을 어지럽히는 등 다양한 내러티브와 대화 형식을 구사하면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작품을 남겼다. 초기 다자이 오사무의 작풍은 삶에 대한 불안감이 주로 나타나 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생가인 쓰시마 가문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스스로의 눈으로 목격하고 자랐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강자를 향한 비판과 약자를 향한 사랑이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동반 자살 후 죽은 여성에 대한 자책으로 작품 중에서 성서를 자주 언급하였다. 하지만 결혼을 한 뒤에는 생활의 안정을 찾으면서 「부악백경」, 「달려라 메로스」 등과 같은 밝은 내용의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이외에도 전쟁 중에 쓴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오토기조시(お伽草子)』는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다른 이야기를 공상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일기나 옛날이야기도 다자이 오사무의 손만 거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이 표현력이 다자이 오사무 작품의 매력이기도 하다.
또, 전후 격동의 시대에 100엔짜리 지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화폐(貨幣)」에서는 인간성과 삶의 기쁨을 묘사하고 있으며, 『사양』과 『인간실격』에서는 아름다운 쇠락을 긍정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관이 표현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일컬어지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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