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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고골의 외투 - 작은 인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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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들은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그만큼 도스토예프스키는 고골을 높이 평가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 등 당대를 대표하던 작가들이 모두 고골에서 유래하였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1. 고골의 외투를 읽고

 

평범하다 못해 그보다도 존재감이 없는 주인공, 이름도 특이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그러한 인간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누구에게도 존중 받지 못한 삶을 살았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 작은 인간이었다. 그러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자신의 외투가 낡고 헤진 것을 알고 외투를 마련하려 하였다. 삶에서 아무 의욕과 기쁨없이 살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외투를 장만한다는 기대가 삶의 새로운 의욕이 되어 전에는 없던 생기 있는 생활을 잠시나마 하게 된다.

 

가난하고 너무나 작은 존재의 생을 사는  말단 관료의 삶과 고위 관료의 태도에서 러시아 관료사회의 일면을 있기도 하는 작품이며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죽어서 유령이 된다는 약간 기괴한 줄거리의 소설이기도 하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태어나서 죽어도 사회는 그가 있거나 없거나 똑같이 흘러간다. 하긴 나라의 왕이 죽어도 마찬가지다. 하찮은 존재이거나 왕에게도 죽음은 차별을 두지 않고 다가오는 것이다.

 

작은 인간은 능력도 없고 사회성도 결여되어 사회의 멸시와 소외를 겪는 인물을 말한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전형적인 작은 인간이다. 고골은 아카키예비치를 억압하는 관료 사회 구성원들의 부조리함을 비판하는 한편 자체는 보잘것이 없는 작은 인간 또한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2 외투 줄거리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페테르부르크의 관청에서 서기로 일하는 말단 관리이다. 적은 봉급에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지만, 볼품없는 외모와 유한 성격 때문에 항상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살았다. 어느 아카키예비치는 그의 외투가 너무 낡아 수선이 불가능해지자 것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다. 먹지도 않고 밤에 촛불을 켜지도 않으며 달의 봉급을 푼도 안쓰고 모아 마침내 외투를 구매했다. 그러나 외투 장만을 축하해준 관청 부과장의 저녁 식사 초대에 갔다 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 외투를 강탈당하고 말았다. 외투를 찾기 위해 아카키예비치는 고위관리를 찾아가지만 그의 권위에 눌려 면박만 당하고 돌아왔다. 충격을 받은 아까끼예비치는 입을 벌린 눈보라 속을 걸었고, 이는 후두염을 유발하게 되었으며, 결국 그는 마땅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되었다. 페테르부르크 거리에는 아까끼예비치의 유령이 출몰해 행인들의 외투를 훔쳐간다는 괴소문이 떠돌았다. 외투를 찾기 위해 방문한 생전의 아까끼예비치에게 호통을 쳤던 고위층 인사 또한 유령을 목도했으며, 외투를 빼앗기게 되었고, 이후 유령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3 외투 등장인물

 

주인공 -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페트로비치 - 외투 수선공

 

고위관료

 

4 작가 -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Nikolai Vasilievich Gogol, 러시아어: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 우크라이나어: Мико́ла Васи́льович Го́голь 미콜라 바실료비치 호홀[*], 문화어: 니꼴라이 고골리, 1809 3 20 ~ 1852 2 21) 우크라이나의 작가이며 극작가이다.

 

1809 우크라이나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818 풀타바 군립 학교를 거쳐 1829 네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젊었을 배우를 지망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문학으로 전환한 고골은 철학, 문학, 역사에 관심을 두었고 이후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1827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 인민의 생활을 취재한 소설 《디카니카 근교 농촌 야화》를 출판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으며, 이때부터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사귀고 이후 그가 남긴 대작의 소재는 거의 대부분 푸시킨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1834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의 조교로서 세계사를 강의했으나 실패하여 퇴직하였다. 1836 희극 《감찰관》을 알렉산더 극장과 모스크바에서 상연하였다. 이는 진보 세력의 절찬을 받았지만, 지배 세력으로부터는 공격을 받게 되어 그는 로마로 갔다. 계속하여 스위스·파리·로마 등지에 거주하였다. 1847년에 하나의 대표작 《결혼》을 쓰고,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명작 《죽은 영혼》의 1부를 완성했고 2부의 집필을 시작하며 1848년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건강을 해친 뒤였다. 결국 《죽은 영혼》을 모스크바에서 완성했으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어려움을 느끼고,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져 원고를 속에 던지고 10일간의 단식으로 자살하였다.

 

주요 작품

그는 작품 속에 당시의 러시아의 현실, 특히 지주 사회의 도덕적 퇴폐와 관료 세계의 결함과 부정 등을 예리한 풍자의 필치로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고골의 사실주의 정신이 훗날의 러시아 문학과 연극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간스 꾸헬가르쩬》(1829)

《지간까 부근 농가에서의 밤》(1 1831, 2 1832)

《미르고로드》(1835)

《아라베스끄》(1835)

《초상화》(1835)

《코》(1836)

《마차》(1836)

《감찰관》(1836)

《죽은 영혼》 (1 1842, 2 일부 1855)

《외투》, 《결혼》, 《도박사》 (『작품집』에 묶어서 출간 1842)

《‘감찰관’의 이해를 위한 열쇠》(1846)

《친구와의 편지교환선》(1847)

《작가의 고백》(1847)

《종교 전례에 관한 고찰》(1852)

《전작 전집》( 14, 1937~1952)

《뻬쩨르부르크 이야기》

작품으로는 《네프스키 거리》, 《옛 기질의 지주들》, 《타라스 부리바》, 《광인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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